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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었다.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마지막 문장을 읽은 2020년 2월 7일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Arrival, 감독 드니 뷜네브)'의 후기(후기 링크)를 올린지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큰 떨림을 받았고, 그래서 이 책을 샀었다. 막상 책을 사놓고 읽지는 못했는데, 그건 텍스트를 읽고 스크린에서 느낀 전율을 상실한다던가, 스크린에 비해 밋밋한 텍스트에 실망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나에게는 쉽게 재밌는 것, 어렵지만 재밌는 것, 어렵고 재미없는 것으로 갈렸다. 출판사 홍보에는 그것 모두 수상이나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바빌론의 탑'은 쉽게 재밌었다. 신이 창세기의 내용처럼 탑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았고, 그것이 하늘의 끝에 거의 다다른 세상에서, 그 공사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탑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탑의 위쪽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공사 현장을 지원하기 위해 그곳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 - 고정 함바집이라고 하면 될까? 그들은 지상에서 식재료를 조달할 수 없으니, 그곳에서 농사를 짓기도 한다. 탑의 고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태양의 방향에 맞춰 식물이 자라는 방향도 달라지는 것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해'도 쉽게 재밌는 편이었다. 실험 약물로 인해 초월적인 두뇌 능력을 갖게 된 남자의 이야기 초반은 영화 '리미트리스'와 비슷했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한계 넘어서며 폭주해버린다. 솔직한 감상은, 흥미로운 초반에 비해 난해한 후반이었다. 

'네 인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특히 영화의 미장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작 자체도 영화가 편집된 것처럼 두 개의 다른 타임라인을 넘나드는데,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유용했다. 이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긴 여운이 남는 질문 때문이다. 무언가의 시작과 끝을 안다는 것, 그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선택한다는 것. 어떤 힘든 일도 큰 흐름의 일부라는 것.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책의 일곱 번째인 '지옥은 신의 부재'였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고, 이것이 이 단편집 전체를 빛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의 설정이 좋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똑같은 곳. 차이점을 찾아보면, 신의 존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이고, 천사의 강림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갈라진 땅으로 지옥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든 생각은,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지옥인가?하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말이다. 신이 없는 이곳엔 인간들만 존재하고, 어떤 이는 신에게 '까불면 죽어'를 외치지만, 정작 그의 말을 들어줄 신은 이곳에 관심이 없다.


테드 창의 단편은 실망을 주지 않는 것 같다. 능력이다. 원문으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번역에서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세세하게 읽고 싶은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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