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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1909)'에 대한 짧은 리뷰를 보게 되었다:

"조선이라는 단어를 보고 책을 덮었다. 조국의 피로 쓴 책을 읽는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2018년에 작성된 리뷰이니, 일본의 수출규제가 일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극단적인 의견처럼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는 일본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후'처럼 소세키 작품에는 '조선'이 자주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그 후'에서 조선은 한 번 등장한다.

"...편지 두 통을 썼다. 하나는 조선의 통감부에 있는 친구 앞으로, 지난번 보내준 고려청자에 대한 감사 편지였다..."

위의 리뷰 작성자가 이 한 줄을 보고 책을 덮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아볼 생각도 않은 채, 그렇게 덮어버리기엔 아까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분노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 '그 후'의 원고


이 책의 주인공은 30살의 '다이스케'로 쉽게 말해 돈 많은 미혼의 백수다. 아버지가 매달 주는 생활비로, 가정부와 심부름꾼(주인공은 그를 서생(書生)이라고 부른다)까지 두고 산다. 집은 자가다. 꿈 같은 삶이다. 부럽다.

 

그러나 그의 삶은 어딘지 텅 비어있다. 목적도 열정도 부재한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문명은 인간을 고립시킨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겉으론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삶을 사는 다이스케를, 그의 가족들은 결혼이라도 시키려고 한다. 이때나 지금이나 남자를 잡아두는 최고의 방법은 결혼이다. 물론 그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주인공에게는 '히라오카'라는 친구가 있다. 히라오카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미치요'다. 아이는 없다. 사실 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엮어준 사람이 바로 다이스케였다. 미치요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절친의 동생이었는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히라오카와 그녀를 결혼할 수 있도록 엮어준다. 여기서 조금 이해하지 못했던 점은, 왜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히라오카에게 '보내주었나'하는 것이다. 다이스케가 예전부터 미치요에 대한 마음을 품어왔던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그 점은 책에서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여하튼 두 사람은 결혼 후, 히라오카의 직장 때문에 지방에서 살게 된다.

 

히라오카와 미치요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고, 남자는 어떤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서 도쿄로 돌아온다. 히라오카는 미치요로 하여금 다이스케에게 생활비를 빌리려고 한다. 이렇게 미치요와 다시 마주하게 된 다이스케는 마음이 요동친다. 아마도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필터를 거친 기억들은 더욱 아름다웠으리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직장도 잃고 자신에게 돈을 꾸어야 하는 하찮은 히라오카에게 시집간 미치요를 '되찾아'오려고 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꼭 필요해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ぼくの存在にはあなたが必要だ。どうしても必要だ。ぼくはそれをあなたに承知してもらいたいのです。承知してください]

 

미치요도 다이스케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고 보인다. 두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뒤로한 채 멀리 떠나자고 약속한다. 이후 다이스케는 '마지막으로' 히라오카를 만나 이 모든 일을 털어놓고, 아내인 미치요를 달라고 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랜덤재생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Rain'이 재생되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 파국. 히라오카는 큰 동요 없이 다이스케의 말을 듣고, 절교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길로 미치요를 데리고 떠난 것 같다. 이후 다이스케가 그들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곳은 비어있었다. 

 

히라오카는 마지막으로 다이스케의 아버지 앞으로 그간의 일을 편지로 쓴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그 편지를 받고,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아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끊을 것과 절연을 선언한다. 여기에 그의 형도 아버지와 뜻을 함께한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유부녀와의 사랑에 대한 것보다 가업을 일으킬 수 있는 혼인 기회를 날려버린 것에 대노했을지도 모른다. 친구와 가족을 모두 잃은 다이스케는 평소와 달리 꾸미지도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서 직장을 찾아본다.

 

이것이 책의 줄거리다.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그 길로 떠났어야 한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사랑을 이뤄내려면 떠났어야 한다. 그 틀을 벗어났다고 틀린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소설로서 '그 후'를 읽고 난 후의 생각이다. 사랑에 있어선 말이 길어도, 생각이 길어도 안 되는 것 같다. 


다시 나쓰메 소세키와 조선에 대해 말한 처음 이슈로 돌아가 보자.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여러 작품 기저에서 서구 문명에 대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메이지 일본이,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 무분별하게 '침범'한 서구 문명을 건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을사늑약을 메이지 일본의 서양 코스프레로 보고, 그 끝은 파국일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그 후'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4년이 지나서 나온 소설로, 히라오카와 주인공을 일본 내의 다른 세력, 미치요를 조선으로 놓고 보면 이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이 책은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다이스케의 마음속으로 그 끝을 모를 만큼 침잠해 간다. 그러면서 당시 급변하는 사회상을 초생강처럼 줄거리 속에 올려놓았다. 어떤 것과 함께 먹어도 그 맛이 확실하게 나는 초생강처럼, 저자는 독자에게 시대 상황을 전달한다.


14장을 읽던 중에 재생된 'Rain'은 마치 책의 신의 장난 혹은 선곡 같았다. 격하게 몰입했고, 손바닥엔 땀이 났다.


1985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고 한다. 그때 히라오카 역에 고바야시 카오루 배우가 맡았는데, 그는 바로 그 심야식당의 사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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