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필자라면 많이들 그랬겠지만, 저 위병소를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거라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내'가 나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랬다. 그날 버스 창 밖으로 본 횡계의 풍경은 지금도 선명하다. 유난히 맑은 하늘이었고, 나는 주먹 쥔 오른손 검지를 살짝 올려 꺾여진 관절 부분을 창문에 약하게 부딫히며, 버스가 빨리 달려주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벌써 그로부터 일 년 반 정도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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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그냥, 12월이 되었다. 어제, 그러니까 11월 30일 밤에 2014년 토정비결을 보게되었다.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이미 거의 끝난 해(年)의 토정비결이라니...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여하튼 토정비결에서 하는 말이, '고사리손으로 활을 잡으니 쏘아도 명중시키지 못하는 형상이라, 하는 일은 많으나 실속이 없는 운수로다'란다. 이런거 믿지 않고 잘 보지도 않지만, 저 한 문장에 나의 2014년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등골이 서늘했다.
사업(?)에서 여러 곳에 손을 뻗쳤지만 1월과 달라진 것이 없고, 만남은 한 달에 몇 번 블라인드를 했지만 그것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날 나쁘지 않은 놈으로 봐준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결론은, 정확히 어느것도 1년 전과 다른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보내려니 아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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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시간을 때우러 한강에 갔었다. 정확히는 반포지구였다 (언제나처럼).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편의점에 갔고, 나는 따뜻한 티백 커피를 선택했다. 나는 1년 내내 따뜻한 음료 쪽을 선호한다. 아무튼, 뜨거운 물을 부으려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물이 나오는 꼭지 밑에 컵이 아닌 내 손을 놓은채로 레버를 눌러버렸다. 당연히 뜨거웠다. 그때 순간적으로 놀라 오두방정을 떨며 뭐라고 했는데 친구가 듣더니 목소리가 경박하다고 폭소했다. 나는 모르는척 했지만, 깜짝 놀랐을때 내 소리가 좀 경박하긴 하다. 인정.
요점은 이후에 손가락이 뜨겁다고 엄살부리던 나에게 그 친구가 한 말이다, '다쳤으니까 이제 나으면 되겠네'. 이 말을 듣고 이 친구를 다시 봤다. 전혀 긍정적인 생각과는 거리가 먼 양반인데... 그때 그 한마디가 내 생각에 작은 파동을 일으킨 것 같다. 나는 정말 좋은 말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세삼 감사했다.
돈이 없으니까 벌면 되겠네.
일이 잘 안풀렸으니까 열심히 하면 되겠네.
러닝 기록이 늘지 않으니까 연습하면 되겠네.
솔로니까 여러 여자를 만나보면 되겠네.
등등 여러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었다.
앞서 얘기한대로 올해는 여지껏 좋은 결과가 없었기에 난 안될 놈인 것 같다며 해탈한 지경이었다. 그후 한강을 떠나는 길에 '옛날친구'한테 까톡이 왔다. <'만나볼래?'> 손가락에 뜨거운 물을 붓지 않았다면 나는, '아니, 정중히 사양할게'라고 답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여서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Yes'를 외쳤고 상대방의 연락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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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선지 태어나서 까톡을 처음 하는 것 마냥 손가락이 굳어있었다. 원래도 까톡같은 걸 잘 안해서 '답장이 늦다' '말투가 차갑다'같은 말로 욕 아닌 욕을 먹어본 나로서는, 특히 낯선 사람과 카톡하는 게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내 말투가 모든 것을 말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형 인간이라 '대면>편지>전화>문자' 순서로 타인과 소통하는 게 편하다. 이날은 여차저차 바로 다음날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당일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치 벽돌 서른 개를 머리 위에 놓은 듯이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이었다. 이런 스트레스는 업무에서 받는 것이다. '스트레스 쌓인다'는 말을 거의 안 할 정도로 원래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데, 하필 이날 답답함이 몰아쳤다. 만남 중에 나는 좀 엉망이었을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은 미녀였다. 한편 나는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 만남 중에 나는 아주 엉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2014년도 마무리 되어간다.
***
지난번 뉴욕에서, 로커펠러 센터. 다시 이 계절이다.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점점 더 집에서 가족들과의 식사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눈도 엄청나게 내렸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 퇴근 때까지 오락가락 했다. 정말 추웠는데, 강한 바람은 체감온도를 아주 멀리 끌고 내려갔다. 이번주 내내 춥고, 점점 더 추워지기도 한단다. 정말 겨울 같다. 어째선지 서울에서의 영하 1도가, 산 정상에서의 영하 20도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이다.
추우니까, 따뜻함에 감사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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