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을 함께 마무리한 책은 영국인 '이언 게이틀리(Iain Gately)'가 쓴 '출퇴근의 역사'(원제 'RUSH HOUR')이다. 이 역시 책장에서 1년반 묵혀두다가 읽게 되었다. 통근이라는 일상의 한 부분에 대한 미시사(microhistory)로, 가볍고 재밌지만 뭔가 많이 남는 책이었다. 총 페이지수(참고문헌 제외)는 약 400페이지로 짧지는 않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금새 마지막 페이지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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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출퇴근을 한다. 걸어서, 자전거로, 자동차와 전철과 페리를 타고 정해진 시간에 집과 직장을 오간다. 이것은 더이상 자연스러울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인간은 출퇴근을 하게 되었을까? 보통 잘 생각해보지 않는 질문같다. 막연히 중세에도, 로마시대에도 그전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퇴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 게이틀리는 통근의 시작을 영국에 철도가 생기는 시점인 19세기 초에서 찾는다. 여기서 시작되는 이 책은, 철도와 도로의 발전이 출퇴근을 어떻게 일상화시켰고, 여기서 야기된 사회적 변화와 도시확장에 대한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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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챕터 '통근의 탄생/성장/승리'에서는 출퇴근의 태초부터 지금까지를 흝어본다. 저자는 출퇴근의 시작을 영국의 철도, 그중에서도 여객철도의 '개발'에서 찾고있다. 사실 그 철도는 원래 화물운반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당시 화물기차에는 노동자 이동용 객차가 단 한 칸 마련되었었는데, 여기서 기회를 포착한 기업가들이 여객철도 개발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포화상태에 다다른 런던시내에서 교외로 이주를 시작했다. 철도를 타면 아침에 집을 나서서 저녁이 되면 집에 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통근비용이 고가였기 때문에 최초의 통근자들은 이러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변호사, 부동산업자 등의 화이트컬러 고소득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추세는 더욱 확대되어, 철도를 따라 주거지역이 개발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후에 '교외'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렇게 주거와 업무가 분리되었고, 19세기의 일이었다.
한편, 표준시간이란 것도 철도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시에는 비교적 작은 국토의 영국에서조차 교회마다 다른 시간대를 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기차 운행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표준시간'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이 '그리니치 표준시'였다.
이후에는 자동차가 개발되면서 자동차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특히 미국에서 발달했는데, 아마도 미국의 자유주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계획적 노후화(planned obsolescence)'의 개념도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원래 제품 수명의 노후화로 소비자들이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개념이었는데, 1920년대 자동차 산업에서부터는 유행의 노후화로서, 소비자들은 낡은 디자인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교체하도록 유도되었다.
요약하자면, 1840년대 '1세대' 통근자들은 철도주변에 주거지를 잡았고, 1930년대 통근자들은 자동차도로 주변에 주거지를 잡았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지하철역과 고속도로와 철도역에 접근이 용이한 동네는 '프리미엄'이 붙는다. 내가 이 책을 읽은게 12월 하순이었는데, 마침 GTX와 관련된 기사들이 연일 쏟아지던 시기라 이 대목이 더욱 인상깊었던 것 같다. 2020년대 한국인은 대심도철도 주변에 주거지를 잡게 될까?
두번째 챕터에서는 출퇴근과 관련된 문화에 대해서 다룬다. 여러가지 중에서도 서양인 작가가 다룬 일본 통근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일본 통근의 에로티시즘이란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치한 행위 등을 뜻한다. 이것은 1907년 타야마 카타이作 '소녀병'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이어져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하다. 신기하게도 영국 여성들은 통근 지하철의 이동중에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정말 문화의 차이는 엄청난 것 같다.
마지막 챕터에서 출퇴근이란 행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마무리된다. 다소 빈약한 논리들이 보이지만 괜찮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현세대와 이후의 밀레니얼들의 자가용 보유수가 그 전 베이비붐 세대보다 낮은데, 그 이유가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세대나 밀레니얼은 정체화된 사회에서 부모세대보다 취업도 늦고, 보수도 적다. 이런 상황에 자가용 보유는 더욱 힘들어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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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잘쓰여진 미시사로, 누가 읽어도 흥미로움을 느낄 것이다. 번역은 부분마다 차이가 났다. 첫 두 챕터의 번역이 가장 양호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장 재밌는 부분이기도 했다. 뒷쪽으로 갈수록 번역의 수준이 떨어짐을 느꼈다. 어색한 어투와 단어의 번역이 눈에 거슬렸다. 원문 자체도 힘이 빠지는 마지막 챕터였는데 번역까지 떨어지니 독자도 힘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고 싶다. 보석같은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모임에서 잡학다식한 사람이 쭉 흝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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