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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일본에서 2023년 4월 13일, 우리나라에는 동년 9월 6일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768페이지나 되는 두께로 벽돌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두꺼운 소설이었다고 생각하는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가 723쪽이었는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것보다도 두꺼운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 보통 2권 정도로 쪼개질 수도 있는 분량 같아 보이는데도 한 권으로 나온 게 인상 깊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평을 먼저 적자면, 재밌는 소설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고는 아니라고 하고 싶다.
 

 

책의 줄거리는 하루키 세계관의 반복이다. 반가운 세계관 - 원래 사람은 반복되는 것에서 편안함과 재미를 느끼는 법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현실세계에서 어느날 썸녀(혹은 첫 여자친구)가 사라짐으로써 상실을 겪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꿈을 읽는 생활을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현실에서 ‘평범한’ 인생을 살던 그는 불현듯 일상에서 벗어나 어느 시골 마을의 도서관에서 도서관 관장직을 맡게 되고, 거기서 기묘한 일들을 겪게 된다.
 
얼마 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대한 책로그를 올리면서, 바로 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원형이었다는 트리비아를 적었었다. 실제로 총 3부로 나눠진 이 책의 1부는 많은 부분에서 '세계의 끝'의 데칼코마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 2, 3부는 새로운 스토리가 펼쳐졌다.

스토리와는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며 독특한 몇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먼저 PPL처럼 나오는 수많은 브랜드 이름과 그에 대한 묘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부분이 하루키 소설의 초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생각해 왔었다. 이런 변화에는 작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혹시 수 십 년 후의 독자를 걱정해서 그런 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지금 존재하는 브랜드가 반드시 미래에도 있으란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 이 소설에는 정사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정사 장면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기다렸건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아예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향후 자기 소설의 방향성을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절필선언은 아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앞선 두 가지 포인트에서 파생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 책에서 작가의 글이 노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부적절한 표현일까 우려되지만, 글이 늙어가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어 온 독자라면 약간 서글플지도 모르는 지점이다. 첫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파릇파릇하지는 않다.
 
한편,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텍스트가 어떤 메타포라는 생각을 철저히 버리고, 그냥 현상으로서 눈앞에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토리를 좇아갔다. 그렇게 한 이유는 최근에 읽은 다른 책에서 일본의 지식인 '우치다 타츠루'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쓴 평론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것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가"라고 하면서, "그가 쓰는 이야기에는 대부분 유령이 나온다. 유령이 나오지 않는 것은 '노르웨이의 숲‘ 한 작품뿐이다"라고 썼다. 나도 지금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초현설적인 설정이 무언가의 은유라고 생각했었다. 우치다 타츠루는 하루키 소설의 "소재가 도회적이고 세련되고 문체도 쿨하다 보니까 작품 속에 유령이 나와도 독자는 그냥 어떤 일에 빗대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읽고 지나가 버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하루키에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은 세상의 중요한 플레이어다"라고 분석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그 도시는 은유가 아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정말로 들어가는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말로 그곳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제나 30대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정사를 상상한다.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주인공은 <마침내> <확실히> 그 도시를 떠난다. 다시 한번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지막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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