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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985년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꽤 평가가 좋은 작품인데, 10년여 전에 이 책을 읽은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그저 그런 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하루키 소설을 논할 때면 나는 다 좋은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2023년,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중에는 이 책의 스토리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원형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안그래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대한 호평들을 접하고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새로운 소설이 나오기 전에 예습차원에서 겸사겸사 다시 책을 펼쳤다. 

 

 
다시 만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새롭게 읽혔다. 한 문장 한 문장, 활자를 먹어치우듯이 읽고,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잘 소화했다. 20대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지금은 이해되었다. 주인공과 같은 나이가 되어서였을까?

예전에는 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온갖 자동차와 술과 음식에 대한 묘사가 PPL처럼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누가뭐래도 현실 그 자체임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써 쓴게 아닌가 싶다. 어딘가에서 그런 재화에 대한 표현을 두고 하루키 소설에 대해 자본주의가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거라고 비판했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한편 그건 '리얼'의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저자의 장치로서도 작동한다.
 


!스포주의!
 
마지막 즈음에 주인공은 "사라져버리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결말을 맞게 되는데, 주인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너무 궁금했다. 결론은 열린결말이라 독자의 해석에 달렸다고 하니, 나는 나름대로 그의 자아가 각각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에 남게 되었다고 생각해버렸다. 즉,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 모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서른다섯은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눈물을 흘리기에 너무 나이를 먹었고, 세상에는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죽기에는 너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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