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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올렸던 포스팅이 5월. 지금은 7월. 많은 일이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부산에 가고, 홍콩에 갔다가 뉴질랜드에 다시 돌아왔다. 월드컵이 열렸고, 우리나라는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맺었다. 난 생애 첫 차를 샀고, 첫 교통사고가 나서 보험회사와 전화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48시간 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기 시작했다.
상실의 시대, 원제는 노르웨이 숲(森)은 스무 살의 필독서로 꽤나 유명했나 보다. 아니, 유명한가 보다. 친구의 소개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영영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매말라 있는지 세상이 알게되었다. 무라카미의 투박한 문체나 일어(日語)를 한글로 번역했을 때 생기는 불가분적 어색함은 이미 1Q84에서 접했던 것이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어색한 부분에서 짧은 일어를 대입해 작가가 추구한 뉘앙스를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는건 작은 축복.
반면, 글의 구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흡입력은 상실의 시대 쪽이 더 강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글의 구성이 후반부로 갈수록 골다공증에 시달리는 1Q84보다, 마지막 마침표까지 긴장하게 한 상실의 시대가 더 탄탄한 글임은 자명하다. 마지막 마침표 뒤는 백지(白紙)였는데 완독 후에도 무언가 있어야 한다는 듯 그 백지를 멍하니 보고 말았다.
놀랍게도, 상실의 시대가 그리는 '젊은이'의 모습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느껴진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존재, 기즈키의 자살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前)세대와 '상실의 시대' 간에 존재하는 갭(gap)을 나타낸 걸까. 그렇게 글 속에서 다른 두 번의 자살을 접했을 즈음, 연예인 박용하의 자살 기사가 떴다. 오버랩. 특별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한다. 물론 유서도 없다고. 글 속의 기즈키도 그렇게 자살 한다. 다만 죽음에 이른 방법이 다를 뿐이다. 故박용하는 핸드폰 줄을 목에 감았고, 기즈키는 차고 안에서 자동차 시동을 켜고 죽었다. 그들의 죽음이 동시에 내 머리에 들어왔고 괜히 두 사람을 비교했다. 무엇을 쫓은 죽음이었을까? 그도 이 글을 읽었을까? 쓸데없는 질문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고, 이 정도로 흔한 자살에서 유효한 의미를, 목적을 찾는 건 부질없다. 망자의 마지막 선택. 여하튼 이런 일들은 글의 몰입도를 높였고, 난 글의 내용이 오늘도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실의 시대와 오늘의 갭은 크다. 일단 오늘은 대학생의 목소리가 죽었다. 신자유주의의 팽창으로 개인간 경쟁이 심화되어 사회를 향한 대학생들의 집단 외침은 죽은지 오래다. 고대 대자보에서 주장한대로 오늘날 대학은 사회의 부품을 만드는 취업 공장이다. 이런 현상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자주 들리지만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다음 10년 간은.
하지만 오늘도 이 글이 '스무 살의 필독서'로 읽히는 건 변하지 않는 그 시기의 심리 묘사 때문이 아닐런지. 또, 신자유주의로 오염된 사회를 살아갈 '사람'을 투영한 나가사와가 독자에게 던지는 말도 놓칠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계속 한 질문을 되내였다. '무라카미, 넌 누구냐?'. 이유는 작가 스스로 이 글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 중 꼭 주인공 와타나베에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 모른다. 죽음을 택할 용기가 없었던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을 수 차례 죽였을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는 기즈키의 자살로 시작해서 또 다른 자살로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의 희망, 혹은 또 다른 절망의 시작. 자신도 모르게 마지막 장을 팔랑거리게 만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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