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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았음에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이 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도 그중 하나다. 나 역시 어느 날부터 책장에 있던 이 책을 당연히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지인이 이 책을 읽어 봤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데미안'의 어디가 재밌는지 도통 모르겠다며 내게 질문을 해왔다. 그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나는 이것을 읽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데미안은 주인공에게 말한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p.123)

 

헤르만 헤세가 책을 통해 선언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20세기 초 독일의 젊은이들은 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기적으로 보면 1919년 발매된 이 책을 읽고 성장한 독일 아이들은 몇 년 뒤 나치 독일의 주축이 된다. 정작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나치에 반대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만하다. 따라서 이 책이 나치 정권을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 책의 강력한 메시지가 독자로 하여금 현재의 위치나 환경을 깨고 나아가라는 강력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독일 청년들이 깨부수고 싶었던 현실은 무엇일까. 이제 막 끝난 1차 대전의 피해도 있었을 것이고, 또 조금 더 앞서 눈부신 경제 기적을 이룬 독일의 그늘에서 파생된 노동 문제, 빈부격차 같은 사회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20세기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천박한 현실은 그들이 깨부수어야 할 알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은 어린 독자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3년여 동안 이어지고 있는 세계적 전염병 위기, 자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 그 뒤를 이어 시작된 40여년 만의 인플레이션. 모두 100년, 40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 지금의 '어른 세대'도 경험이 없고, 따라서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는 다음 세대는 기성세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들이 초래한 세계의 그늘을 자신들이 깨야할 알로 보지 않을까. 

 

'데미안'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30대에 읽어서 다행이다'란 것이었다. 애매한 나이대라 그런지 한발 물러서서 활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만약 10~20대에 이것을 읽었다면 마음 어딘지 울렁울렁 했을 것 같다. 


책의 분위기는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았다. 그 애니메이션에 나온 배경을 상상하며 책을 읽으니 조금 더 입체적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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