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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첫 책로그는 독일인 '엠마 크뢰벨(Emma Kroebel)'이 쓰고 1909년에 베를린에서 출간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로 올린다. 11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내 눈에 띈 건 어느 기사를 읽을 때였고, 그때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을 한참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표지 사진 왼쪽이 손탁 여사, 오른쪽은 저자인 엠마 크뢰벨

 

 

엠마 크뢰벨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 칭다오에서 생활하던 중에, 당시 대한제국 황실 의전담당자(왕궁의전전례관)인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 자리를 비운 1905년 여름부터 1년 정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 맡게 된 인물이다. 이때 손탁 여사는 갑작스레 프랑스 휴가를 떠나게 되는데, 후대의 연구를 통해 그녀가 고종 황제의 외교 밀사로서 미션 수행을 위해 유럽에 가게 되었음이 밝혀졌다.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는 크뢰벨이 고향을 떠나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하며 겪고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이에 앞서 조선까지 오는 길에 여행했던 미국 본토와 하와이, 일본과 중국에서의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는데, 2021년을 살고 있는 내겐 1905년의 조선과 다른 나라를 외국인의 시선을 통해 비교해보는 기회였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빌려온다.

 

"저자는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대한제국 황실에 체류하면서도 대한제국 시기 황실 내부의 역학관계 및 대외정책과 생활상에 대한 서술을 상세히 하고 있다. 독일인의 시선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국인의 시선과는 다른 서술도 있지만, 당시의 모습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우선 황실 의전관련 내용뿐만 아니라, 1905년을 전후한 시기 한국인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인들의 신체적 특징, 세간, 전통문화, 신앙과 종교, 기독교 선교사의 활동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시기 대한제국의 국내외적 상황, 외교적 현실, 황실 깊은 곳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회고록 말미에는 을사늑약 이후 한국이 일본에게 식민지화되는 과정,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광무황제의 퇴위와 융희황제(순종)의 즉위, 일본의 지배에 저항한 의병들의 봉기 등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조선이 동시대 유럽인에게 생소한 곳임을 표현하면서, "무엇이든 잘 찾아내고, 또 무역에 열성적이었던 백인들이 지구 한편에 있는 이 나라를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이다. 유럽의 문화 탐험자들에게 티베트 다음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또한 연구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p.154)라고 썼다.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지만, 현실은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세 열강이 이 '영국만 한' 작은 땅을 자기 세력권에 놓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어서 이 나라가 누리고 있는 고요함은 사실 "폭풍 전야의 긴장을 나타내는 '고요'"(p.151)라고 분석했다. 을사늑약 전후로 혼란스러운 조선의 모습이 외국인의 시선으로 깊이 관찰된 것 같다.

 

정치보다도 생활상에 대한 부분은 어느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그녀의 글이 그 시대를 그린 영화나 드라마보다 그것을 더 질감있게 묘사한다. 이 책에서 그 시기에 열린 연회와 그곳에 마련된 음식은 상상보다 더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화려함은 강국의 위협으로 위태로웠던 조선이 자신의 건재함을 세계에 어필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안쓰러웠다. 한편, 그 요리들을 준비한 요리사 중에 궁궐에 상주한 중국인 요리사가 있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 요리인지 가리지 않고 일품으로 만들어내는 존재였다고 묘사된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이 아니면 몰랐을 것이다.  

 

초가집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너무 작고 부실해 보이는 집인데도 전기가 연결된 가구가 많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저자는 조선의 전기 보급률이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보다 높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인터넷 보급 초창기에 컴퓨터를 못 쓰는 집에도 ADSL이 깔렸던 것이 중첩되어 생각났다. 

 

 

Filet braise aux truffles 트러플 소고기 찜? 2017년에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재현한 대한제국 연회식 

 

 

당시 황실 만찬에 올라왔던 메뉴에 대한 부분은 서너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 시기에 트러플이나 올리브, 프랑스 샴페인 같은 식재료가 어떻게 조선에 들어왔는지 신기했다. 아스파라거스 포타주, 연어버섯구이, 비둘기구이, 푸아그라, 트러플 소고기 찜? 등으로 시작해서 치즈와 어소티드 디저트, 커피, 코냑으로 마무리하는 식단은 지금도 평범한 구성은 아니다. 초가집과 트러플이 공존하는 곳이 대한제국이었다. 

 

 

Poisson roti aux Champignons 연어버섯구이?

 

 

크뢰벨은 1905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와 관련된 일화도 소개했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책의 출간과 함께 국제적인 논란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엘리스 루스벨트 일행이 자신들을 위해 황실에서 마련한 환영 행사에서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 기록했는데, 미국에서는 루스벨트의 딸이 그럴 리 없다며 크뢰벨을 정신이상자 취급했다. 엠마 크뢰벨의 오명은 100년이 지나서야 해소되었다. 홍릉의 수호석상에 올라탄 엘리스 루스벨트의 사진이 코넬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을사늑약에 대해 저자는 호의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에는 급격한 속도로 철도가 늘어나고 길이 정비된 점. 전국에 법원이 들어서고 교육제도가 정비되어 실질적인 근대화가 일어난 것 등을 저자는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녀는 민법과 형법이 자리잡고, 제대로 된 경찰력과 교육제도가 생기면 결과적으로 조선 사람에게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적었다. 이때는 조선 식민지화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기 전이었음을, 그리고 일제의 수탈이 심해진 2차 대전보다 40년 정도는 앞선 시기였음을 반드시 기억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살고 있는 나는 그런 크뢰벨의 문장이 사실 조금 불편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조선 사람의 저항이 이미 그때부터 강했다고 한다. 어쩌면 정치권력과 대중이 원했던 사회는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권력은 일본의 점령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뺏길 것을 우려했으나, 대중은 그냥 살던대로 살고 싶었는데 사회 개혁을 밀어붙인 일본의 강압적인 태도가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한국인이 그냥 일본을 싫어한다고 썼다).

 

만약에, 조선이 김대건 신부(1840년대)의 재능을 활용하여 일본보다(1850년대) 먼저 서양과 관계를 맺었다면

만약에, 거문도를 점령(1885년)한 영국이 마음을 바꿔 조선을 식민지화 했다면

만약에, 비교적 온건했고 일본 국내 정치에서 밀려난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고 계속 통감직을 수행했다면

만약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만약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이겼다면 (가장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만약에~ 이랬다면 1905년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해보면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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