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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울대에 교환학생으로 있는 친구가 자기네 학교에 안철수 교수가 강연을 오니 한번 와보라고 제안했다. 안철수 교수에 대해서는 겨우 V3를 만들어 낸 벤처사업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오직 호기심에 이끌려 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월차를 하나 써서 갔다.

"한국벤처기업의 성장과정: 안철수연구소의 사례"

서울대는 인상 깊었다. 시가지 한가운데에 난립해 있는 우리 학교(오클랜드 대학교)와 달리 서울대는 넓은 담장 안이 '학교'인, 어릴 적 상상했던 [캠퍼스]였다.

아무래도 안철수 교수의 인지도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서울대 학생들이 열정적이어선지, 강의실은 꽉 차있었고, 친구와 나는 계단에 앉게 되었다. 우리가 앉은 계단이 처음에는 몰랐는데 중앙 계단이었나 보다. 강연 시간이 되니 안철수 교수가 우리가 앉아 있는 계단 위쪽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안철수 교수가 우리 코앞을 지나갈 때 친구가 건넨 말: "무릎팍 도사에서 본 거랑 똑같다". 당연하지 이 사람아 이분이, 그분이다...

출처: 연합뉴스 홈페이지. 저기 어딘가에 나도 있다.

안철수 교수는 차분하게 하지만 듣는 이들을 몰입시키며 강연을 이어갔다. 이 강연은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이어졌는데, 사실 평소같으면 내가 식곤증에 시달릴 시간인데 단 한 번의 꾸벅임 없이 깨어 있었다. 확실히 내공이 있으신 분이었다.

강연 시작에 앞서 무릎팍 도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안철수 교수는 방송을 보니 진지한 이야기는 모두 편집되고 농담만 나왔다고 한다. 오늘 강연에서는 그 편집된 부분들을 듣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오늘 강연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기록해 놓고 싶다. 잊어버리기 전에.

이 분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이 받는 문명의 혜택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함으로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면모를 지닌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V3를 초기에 무료로 배포한 이유가 자신이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며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베푼 것은 없어 이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지금의 우리: 학생, 특히 사회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연애 걱정, 학점 걱정 등등 개인 차원의 걱정들에 치여 사회에 대한 보답은커녕 걱정도 하지 못하는 게 사실인데, 안철수 교수의 메세지는 이러한 점을 환기해주었다.

이어 그는 성공은 실패와 동등하다는 다소 역설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말하길 성공이나 실패나 한 사람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결론은 과거를 잊고, 현실을 직시하라. 또, 결과에 욕심내지 말고, 과정에 신경을 쓰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까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쪽을 향해 가라고 전했다.

한국 벤처의 모범이라고 일컬어지는 안철수 교수는 의외로 학생들의 창업에 크게 반대했다. 그는 빌 게이츠나 마이클 델 등 세계적으로 대성한 청년 창업가의 존재를 물론 인정했지만, 사회 경험이 일체 없이 창업하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길 사업은 학교에서 알려주는 것 외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고 했다. 어음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사업 분야에 어떤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는지, 산업의 흐름은 어떻게 되는지 하는 것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고 말하며, 졸업 후 적어도 2, 3년 정도 한 회사에 취직하여 경험을 좀 쌓고 새로운 길을 가도 늦지 않다고 조언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그가 요즘 성행하는 '스펙 쌓기'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을 때다. 요즘 흔히 스펙을 쌓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위험한 발상이라고. 요즘 여러 가지 공부를 해서 분야 간 시너지 효과(강연 때는 다른 표현을 썼는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를 노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런 효과를 얻으려면 각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학부 과정만으로는 그러한 이해를 얻기가 어려우며, 또 설사 한 분야를 깊이 이해한 다음, 다른 분야를 이해하다 보면 이전에 습득한 분야에 대해 잊어버리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것을 즉 [한우물만 파라]라는 말로 이해했다. 일전에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젊은이들에게 한우물만 파라고 조언했었다. 이런저런 조언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며 괜히 스펙 쌓는다고 여기 맛보고 저기 맛보고 하기보다 지금 하는 공부를 좀 깊이 파볼까 한다. 한 우물을 깊이 파다 보면 다른 지식과의 융합될 경로가 보인다고...

위에 쓴 것들 외에 여러 가지 좋은 말들을 들었다. 가령 요즘의 산업구조는 대기업과 하청으로 나뉘는 수직적 산업 구조에서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수평적 산업 구조로 바뀌어서 기업 간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애플 아이폰과 국내 대기업을 예로 들며)과 한국의 산업 환경에서도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글의 힘을 무시하지 말고, 글을 쓸 때 역사의식을 갖고 쓰라는 것 등이다.

강연은 끝났고, 안철수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강연에는 뜻밖의 요점들도 있었지만, 많은 면에서 지금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 기회가 많이 있었다. 강의실을 나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약간 후회가 들었다. 오클랜드 대학교는 뉴질랜드에서 나름대로 가장 명망 있는 학교니까 분명 좋은 강연들도 많이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무관심했고, 이런 기회를 눈앞에서 그냥 보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연에 초대하는 메시지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다시 1학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르게 할 것 같다. 하지만 낙심은 안 했다. 아직 졸업까지 아주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는데 이 동안이라도 지금 생각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안철수 교수도 말했다.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행동하라고, 그러면 10년 후에 할 후회를 안 해도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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