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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부러워한다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해방 이후였을까, 1948년 정부 수립이었을까, 아니면 1987년 6월 항쟁이었을까. 어떤 지점을 골라도, 출발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무언가가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다음 국면으로 넘어간 느낌 때문이다. 

해방은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깨끗한 출발은 아니었다. 친일 인사들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이름만 바꾼 채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분단과 전쟁은 이 왜곡된 상황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혹은, 묻어버렸다. 미군정은 반공을 앞세웠고, 이승만 정권은 국가 정통성을 냉전 체제에 기대어 세웠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국회가 있었지만, 시민은 정치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마치, 뿌리 없이 흙 위에 세어진 나무 같았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청산을 미룬 채, 그 과거 위에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정통성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었던 국가는, 끊임없이 '우리는 옳다'고 외쳐야 했다. 민주주의, 자유, 반공. 이 세 단어는 구호가 되었고, 슬로건이 되었고, 때로는 의심조차 허락되지 않는 신념이 되었다. 슬로건은 반복될수록 그 속은 비어갔다. 이 땅에 전해지는 문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대신,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가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이념 전장이 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자유민주주의의 등장으로 민주주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와 있을까. 어쩌면 그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과거를 믿은 채 같은 현재를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과거를 직면하고, 책임을 묻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민주주의는 다시 과거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세계에 내세울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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