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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장마가 이어지던 지난 9월쯤 읽었던 책이다: 데라다 도라히코(1878-1935)의 수필집 '도토리'(강정원 옮김, 민음사). 낯선 작가의 여러 수필을 모은 책을 찾은 이유는 어디선가 소개받았던 '도토리'라는 글을 읽기 위함이었다. 저자에게 생소함을 느끼는 게 나뿐만이 아닌 듯, 이 책의 역자는 ‘문학하는 물리학자의 인생 수필’이라는 부제를 통해 저자를 한 줄로 소개하고 있다.

 

도라히코는 이 책의 부제처럼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일본의 물리학자이자 문인으로 특히 나쓰메 소세키와의 깊은 인연이 유명하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도라히코가 소세키의 제자들 중 최고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이나 서양음악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세키가 도라히코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는 사실로 보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친구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일례로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과학자인 '미즈시마 간게츠'는 도라히코를 모티브로 쓰였다는 추측이 있을 만큼 두 사람이 꽤나 가까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캬바레 간판같은 표지가 돋보인다


수필 '도토리'는 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았는데도 막상 다 읽었을 땐 조금 울컥했다. 사실 미용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읽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만약 아내 옆에 앉아서 읽었다면 목이 메이다 못해 창피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수필들이 가득했다. 일상에 대한 이야기, 과학에 대한 이야기, 지어냈는지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글들처럼 말 손이 움직이는 대로 쓴 글들. 그중에서도 시간에 대해 쓴 글들이 인상깊었다.

(중략)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잘못인 것 같다. 결과가 일어나지 않고 원인이 어디에 있으랴. 중력이 있기 때문에 천체가 운행하고 사과가 떨어진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는 반대였다. 영국의 시골에서 사과가 떨어진 뒤에 만유인력이 생겨난 것이다(p.115).

 

저자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인다

그 인력이 얼마 전에 독일의 어느 유대인의 연필 끝에서 개조되었다(p.115).

 

지금 우리는 그 유대인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고 있다 - 이름하야 알버트 아인슈타인. 당시 도라히코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글 쓰는 물리학자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유머를 구사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을 위한 환영파티에 도라히코도 참석했다고 한다. 

 

 

또한 관동대지진 때 퍼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흥미롭다.

집에 돌아오니 화재에서 몸만 피한 아사쿠사의 친척 열세 명이 피난 와 있었다. (중략) 순경이 와서 ㅇㅇ명의 방화꾼이 배회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단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느니 폭탄을 던졌다느니 별의별 뜬소문이 다 들려왔다. 이런 변두리 동네까지도 휩쓸어 버리려면 도대체 몇 천 킬로그램의 독약, 몇 만 킬로그램의 폭탄이 필요할 것인가. 이런 어린짐작만으로도 나는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p.139).

과학적인 사고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럴싸하지만 의심스러운 소문에 대해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얘긴지, 아닌지 좀 더 자명해질 때가 꽤 있다. 당시 떠돌던 그 괴소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도 그때의 일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커피맛에 대한 의견도 흥미롭다.

눈이 오거나 으슬으슬한 비가 내리는 날에 왜 커피 맛이 좋은지는 기상학자나 생리학자도 모를 것이다. 습한 공기 때문에 순수한 '갈증'을 느끼지 않아 여유가 생긴 혀의 감각이 특히 섬세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p.198).

 

도라히코가 공상했던 미래를 사는 사람으로서 그의 예상이 오늘날과 비슷한게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다. 

화학 약품 말고는 약이 없는 듯 여겨지던 시대 다음으로, 옛날의 초근목피가 다시 새로운 과학적 의의와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돌아올 것 같다. 그 시대가 올 무렵에 손으로 짠 구사키조메 무명이 가장 말쑥한 도회인의 새로운 유행과 취미의 대상이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리고 물레나 손베틀이 가정의 소일거리로 자리 잡는 일이 장래에 결코 있을 수 없으리라고 증명하기도 어려울 듯싶다. 실제로 많은 고관이나 부호가 일요일에 일부러 시골로 농부 체험을 하러 가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한 요즘에는 더욱 그러한 공상을 하기 좋다(p.247-248)

 

두껍지 않은 책이고, 가벼운 종이에 크기도 작아서 들고다니기 좋았다.

이제 겨울이고 눈이 내릴 것이다. 그때 다시 이 책을 끄집어내어 아내가 내려준 커피와 함께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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