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의 장점은 물리적인 무게가 가볍다는 것과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책을 넣어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이것은 '풍요 속의 빈곤'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최대 단점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완독하고 곧바로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의 <산월기>를 열 수 있었다. 이북이 아니었다면 긴 출장 여정동안 읽을거리가 없었을 것이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나카지마 아쓰시'라는 작가는 또 다른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를 구글링 하다가 연관 검색어로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몇 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번에 읽은 문예출판사 <산월기>에는 책은 총 열두 편의 소설을 수록하고 있다. 이중 중국고전을 소재로 한 아홉 편과 조선을 배경으로 한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표제작인 <산월기>를 비롯해 <이릉>, <제자>, <호랑이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 등이었다.
<산월기>는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자존심에 발목 잡혀 짐승이 되어버리는, 단순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출세한 시인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자존심과 수치심만 남은 채 숲으로 숨어들어 호랑이가 된다. 그 모습은 재능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초상처럼 보였다. 이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도 자주 수록된다고 한다.
<이릉>은 중국 한나라 장수 이릉의 비극을 다룬다.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라 ‘충성과 고뇌, 패배자의 운명’을 그려낸 깊이가 돋보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나카지마가 단순히 옛 중국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시대적 고통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읽는 과정에서,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에 협력한 조선 인사’와 ‘끝까지 저항한 독립지사’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호랑이 사냥>은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저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 더욱 생생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돋보였다. 한반도의 상징과 같은 호랑이. 그런 호랑이를 사냥하는 조선인들, 그들 옆에서 잔뜩 겁을 먹은 일본인 저자. 겉보기엔 단순한 사냥 이야기지만, 그 밑바닥에는 ‘일선융화’나 ‘내선일치’를 외치던 당시 일본 제국의 어색한 민낯이 숨어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읽은 <순사가 있는 풍경>은 순사의 시선으로 본 조선의 거리를 인상파 그림처럼 스케치한 작품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일본인 학생, 조선인 순사,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는 정치인, 조선인 매춘부…. 각 인물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그 풍경 속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 구조가 드러난다. 약간은 풍자적인 재미가 있어서 엄중하거나 고전적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카지마 아쓰시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더 좋은 작품을 남겼을 작가인데, 그렇지 못한 게 조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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